유민 사상 번역

 

유민 사상 번역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중국어번역)

 

유민 사상 번역

유민 사상 번역(중국어 원본)

游民是脱离了社会正常秩序与社会网络的一群。古代游民主要是指脱离了宗法家族和主流社会有效控制的一群。他们在社会中的特殊地位及其独特的经历造成了他们群里性格的独特性。这独特的一面突出表现在他们对自己的观念、性格、情绪很少加以掩饰上。 王学泰,『游民文化与中国社会』,学苑出版社,2007,p230

文明也可以说是特定意义和特定环境下的掩饰与克制。封建社会的主流意识——儒家思想强调“克己复礼”,也就带着克制动物性泛滥之意。荀子认为性善是后天学习的结果,而人先天的本性为恶,必须用善加以克制。中韩两国封建社会的文化形态以小农生产为经济基础,以地域、宗法为联系纽带的,用现代的眼光来看,其阻碍社会健康发展的表现为:由于生产发展水平底下而愚昧、文化普及程度底下而野蛮、宗法群体的排外性而拉帮结派同党伐异,以及小农牧生产决定的注重眼前功利。儒家思想正是宗法制度在思想意识层面的反映,它必然对这种极端愚昧野蛮,扼制人性健康发展的文化形态起着维护强化的作用。但是,作为一个由广泛和深远影响的思想流派也必然有其超越的一面,有符合人类永恒价值的健康文化因子。
儒家向往大同社会,主张忠恕仁爱之道,强调’四海之内皆兄弟’等。古代传统文化中的不光彩一面被历代儒者所制造的‘仁爱’、‘忠恕’、‘君子群而不党’、君子‘忧道不忧贫’等富有诗意的幻想所掩盖。儒家所提倡的对己克制,对他人忠恕的主张目的是重视人的角色地位,不要偏离,这样才能维持社会的稳定。
在主流社会中保有具体社会位置的人都是了解自己所处角色的权利和义务的。士大夫们看重自己的社会群体中的角色地位,谨守传统思想为这些角色所规定的一切。而‘四民’之中的农民、手工工人、商人,只要他们有产有业,他们也要负担宗法社会所赋予他们的角色义务。而游民与在这些规定下的‘四民’不同,他们脱离了主流社会,失去了自己的角色地位。许多游民无妻无子,没有为人夫为人父的职责,没有宗亲故旧的监督,他们是没有根底,随着时势浮沉游荡的一群;他们没有地位,失去了社会的尊重。因此,他们反对现存社会秩序,也不必考虑角色位置为人们所作的种种规定。总之,主流社会对让你们的种种规范,如果不是有严刑峻法摆在眼前,游民是不太顾及的。他们的思想意识和行为表现都有着强烈的非规范性。
游民思想中的反抗型理想社会首先具有平等原则。近代的平等原则也许是市场经济的产物,而古代关于平等观念始于墨家。墨子的‘兼爱’正是把所有的人,包括亲近之人与疏远之人,等量齐观。在墨家看来,天下一家,凡间皆路人,心间皆兄弟,这就是他们对平等的理解。游民不是新的生产力或新的社会关系的代表,也缺少文化知识,提不出一套关于新的社会模式的设想。然而由于长期沉沦在社会底层,受尽他人白眼与凌辱,他们本能地追求人际关系的平等。除了不侈谈‘兼爱’以外,游民的‘平等’观念或许从墨家那得到一些提示。平等关系在封建社会中只有朋友关系近之,于是,这便成为了他们追求的目标。但游民在表达自己对人际关系的平等原则追求时还是拖离不了主流社会所尊崇的儒家,用他们的话语作为自己的思想材料。儒家五伦,即君臣父子夫妇兄弟朋友。如果说主流社会的人们更重视前四伦的话,而‘朋友’一伦则更受游民们的欢迎。这些脱离了家族宗法制度的游民更希望人们把他们当做兄弟,在必要时互相帮助。他们一见如故,互相提携,情逾骨肉。然而这种平等思想却又不是普施于所有人,贪官污吏不必说,是游民英雄打击的对象,但也有许多无辜的平民百姓也常常死在豪杰的板斧朴刀之下。如『水浒传』江州劫法场时李逵就不问何人“抡着大斧,只顾砍人”,心中绝无兼爱观念。因此。平等思想仅仅存在于那些能够与自己互相救助的人们,或者有可能加入自己的互救的游民群体的人。而这种互救群体是以结义或者结拜的方式固定下来的,只要进入游民组织,他们便互认为是基本上平等的。 王学泰,앞에 책,2007,p286-288 参考
如”梁山泊108将“和”活贫党”等。而同时为了与社会主导意识形态相协调,在其建立的理想国忠还特别强调忠义,特别是在其形成过程中面临压迫,矛盾十分尖锐的情况下仍固守忠义,这也反映了他们虽然游离于社会正常秩序之外,但却不能完全摆脱传统文化的影响。
上节笔者对『水浒传』里梁山好汉们所倡导的“替天行道”的思想意识进行了说明,那么“替天行道”的主题是谁呢?自然是那些勇敢的敢于反抗社会的游民英雄。“替天行道”的目的是“救民”,因此在游民的造反活动中几乎都是以民众的代表着自居的,仿佛他们不是为了自己的利益才冒死走上反抗社会的道路。而“王道主义”是指皇帝至尊,皇权至上的观念,自进入文明社会之后,君主一直处于社会的巅峰,他的臣民按照地位的不同,分门别类的匍伏在其脚下。人们在“君权神授”的观念熏陶下,把君王视为天之骄子,代天行权。而由‘替天行道’转变为‘王道主义’,是从游民领袖到帝王的社会地位变迁的结果。二者似乎雅俗有别,但它们之间相距却不甚远,因为它们的思想根源都在于深信自己的个人意志应有绝对自由的活动空间,并具有自由伸张的绝对权力。他们确定自己的一切想法,一切行为及其结果都具有绝对的真理性,都代表上天的意志。实际上,他们及其所属集团都有自己的特殊利益,他们的奋斗是为了争夺和实现这种利益,这本来是无可厚非的,然而他们总是有意无意的掩盖这一点,宣传他们的所作所为纯粹是为了解救陷于痛苦灾难而又不能自救的人们,从而使其反抗社会变得崇高起来 王学泰,앞에 책,2007,p418-419 参考
。在反抗社会的游民圈中,虽有高举‘替天行道’的大旗,其中也不乏‘王道主义’思想。游民首领画地为王,并进行了严格的等级分配,一但出现外敌则提出是‘代天行罚’等,這些可以在『水滸傳』『洪吉童傳』等同通俗文藝作品中清晰地看到。

유민 사상 번역(한국어 번역본)

유민(游民: 부랑자)은 사회의 정상적인 질서와 사회 네트워크를 벗어난 무리이다. 고대 유민은 주로 종법(宗法) 가족과 주류사회의 유효한 통제를 벗어난 무리를 가리켰다. 그들이 사회에서 갖는 특수한 지위와 독특한 경력은 그들 무리 안의 성격의 독특성을 형성하였다. 이런 독특한 한 측면은 그들이 자신의 관념, 성격, 정서를 매우 적게 감춘데에서 크게 드러난다.1)
문명은 특정한 의미와 특정한 환경 아래에서 감추고 억제하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봉건사회의 주류 의식인 유가사상은 “극기복례(克己复礼: 자신의 욕심을 누르고 예의범절을 따른다)”를 강조한다. 동물적인 범람(퍼져나감)을 억제하는 뜻이 있기도 하다. 순자(荀子)는 성선(性善)은 후천적으로 배우는 결과이며 사람의 선천적인 본성은 악이고 선으로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한·중 양국의 봉건사회의 문화 형태는 소농 생산을 경제 기초로 하고 지역, 종법을 연결 유대로 삼았다. 현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생산 발전 수준의 저하로 우매하고, 문화 보급 정도의 저하로 야만스럽고, 종법 집단의 배타성으로 패거리를 짓고 동당벌이(同党伐异: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같은 의견의 사람끼리 한패가 되고 다른 의견의 사람은 물리침)하고, 소농목 생산으로 결정되는 눈앞의 실리에 역점을 두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난다. 유가사상은 종법 제도가 사상 의식 측면에서 반영된 것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이런 극단, 우매, 야만에 대해 그리고 인성적이고 건강한 발전을 억제하는 문화 형태에 대해 보호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영향을 주는 사상 유파에도 필연적으로 그 초월하는 측면이 있다. 또한 인류의 항구적인 가치에 부합하는 건강한 문화 요소가 있다.
유교(儒家)는 대동사회(大同社会)를 동경하며, 충서인애(忠恕仁爱)의 도리를 주장한다. 또한 “천하에는 모두가 형제다(四海之内皆兄弟)” 등을 강조한다. 고대 전통 문화가 찬란하지 않던 측면은 역대 선비에 의해 만들어진 “인애”, “충서”, “군자는 남을 이기려고 애쓰지 않는다(君子群而不党)”, “군자는 자신의 됨됨이에 대해 근심하지 자신이 부하고 가난한 것에는 근심하지 않는다(忧道不忧贫)” 등의 풍부한 시적인 정취의 환상에 의해 가려졌다. 유교에서 제창한 자신을 억제하고 타인에 대해 충성하고 용서하라는 주장의 목적은 사람의 역할과 지위를 중요시하고 이탈하지 않도록 한데 있다. 이렇게 해야만 사회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주류 사회에서 구체적인 사회적인 지위를 갖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처한 역할의 권리와 의무를 이해한다. 사대부들은 자신의 사회 집단에서 역할과 위치를 중요시하고, 전통 사상을 이런 역할에서 규정한 모든 것으로 하여 엄격히 지킨다. 그런데 “사민(四民: 사농공상)” 중의 농민, 수공 공인, 상인은 재산과 일이 있어야만 그들은 종법 사회가 그들에게 부여한 역할을 하고 의무를 진다. 유민은 이런 규정 하의 “사민(四民)”과 다르다. 그들은 주류 사회를 이탈하였고, 자신의 역할과 지위를 상실하였다. 많은 유민은 아내와 자식이 없고, 남편과 아버지의 직책이 없다. 또한 친족과 친구로부터 감독을 받지도 않는다. 그들은 근본이 없는 시대의 형세에 따라 떠돌아 다니는 무리이다. 그들은 지위가 없으며 사회의 존경을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현존하는 사회의 질서를 반대하고, 또한 사람들이 정한 각종 규정에 대해 역할과 위치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주류 사회의 각종 규범에서 만일 엄격하고 가혹한 형벌과 법령이 앞에 펼쳐지지 않는다면, 유민은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의 사상 의식과 행위의 표현은 강렬한 비규범성을 갖고 있다.
유민 사상 중의 반항형 이상 사회는 먼저 평등 원칙을 갖는다. 근대의 평등 원칙은 어쩌면 시장 경제의 산물일지도 모르며, 고대의 평등 관념과 관련해서는 묵가(墨家)에서 시작되었다. 묵가의 “겸애(兼爱)”는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동일시한다. 묵가의 견해로 보면, 천하는 한 집이고, 속세는 모두 길을 오가는 사람이며, 마음 속은 모두 형제이다. 이것은 그들의 평등에 대한 이해이다. 유민은 새로운 생활력 혹은 새로운 사회 관계를 대표하지 않으며, 또한 문화 지식이 부족하다. 새로운 사회 모델과 관련한 생각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사회의 하층으로 하락하여 타인으로부터 업신여김과 능욕을 받기 때문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인간관계의 평등을 추구한다. “겸애”를 말하는 것 외에도, 유민의 “평등” 관념은 어쩌면 묵가로부터 힌트를 얻은 것인지 모른다. 평등 관계는 봉건사회에서는 친구 관계일 때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유민은 자신이 인간관계의 평등원칙를 추구한다고 표현할 때 주류 사회에서 숭배하는 유교를 벗어날 수 없다. 유민은 그들의 말을 자신의 사상 재료로 삼는다. 유가 오륜(五伦)은 군신, 부자, 부부, 형제, 친구이다. 주류 사회의 사람들이 앞의 사륜(四伦)을 중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친구” 일륜(一伦)은 유민이 더욱 좋아하는 것이다. 가족 법제 제도를 벗어난 이런 유민은 사람들이 그들을 형제로 삼아 필요 시 서로 간에 돕기를 더욱 바란다. 그들은 첫 대면부터 옛 친구처럼 친해지고 서로 간에 도와주며 절친해진다. 그런데 이런 평등 사상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베풀어 지지 않는다. 탐관오리는 말할 조차도 없이 유민와 영웅이 공격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무고한 많은 평민 백성들도 항상 호걸들의 도끼와 칼 아래에서 죽는다. “수호전” 강호가 도장(法场: 승려들이 법사를 행하는 곳)을 약탈할 때 이규(李逵)는 어느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큰 도끼를 흔들며 오직 사람을 치는 것만 생각하고”, 마음에는 겸애 관념이 없었다. 그러므로 평등 사상은 단지 자신과 상호간에 도울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나 혹은 자신의 상호 도움을 주는 유민 집단에 들어간 사람에게만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상호간에 도움을 주는 집단은 의형제 맺기 방식으로 고정된 것이다. 부랑 조직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들은 상호간에 기본적으로 평등한 것이라 생각한다.2) 예를 들면, “량산포 108명의 호걸”과 “활빈당” 등이 그러하다. 이와 동시에, 사회의 지배하는 의식 형태에 맞추기 위해 세운 이상국가는 특히 충의를 강조한다. 특히 그 형성 과정에서 압박을 받고 모순이 매우 첨예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충의를 고수한다. 이것은 그들이 비록 사회의 정상적인 질서 밖으로 동떨어 졌지만 전통 문화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반영한다.
위의 절에서 필자는 “수호전”의 량산 호걸들이 제창한 “하늘을 대신해서 정의를 행함(替天行道)”의 사상 의식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하늘을 대신해서 정의를 행함(替天行道)”의 주제는 누구인가? 당연히 사회에 용감하게 맞서는 유민 영웅들이다. “하늘을 대신해서 정의를 행함(替天行道)”의 목적은 “백성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민의 반역 활동에서 거의 모두가 민중을 대표하여 행세하는 것이다. 마치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목숨걸고 사회에 대항하는 길을 걷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왕도주의(王道主义)”는 황제지존, 왕권지상(至上)의 관념을 가리킨다. 문명 사회에 들어선 후 군주는 사회의 최고봉에 올라 있다. 그의 관리와 백성은 각자의 지위에 따라 군주의 발아래 놓여 있다. 사람들은 “군권신수(君权神授)” 관념의 영향을 받아 군왕을 하늘의 총아로 간주하고 하늘을 대신하여 권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하늘을 대신해서 정의를 행함(替天行道)”에서 “왕도주의”로 바뀐 것은 유민 지도자로부터 제왕까지의 사회적인 지위 변천의 결과이다. 후자는 고상함과 속된 것의 구별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 간의 간격은 멀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상 근원은 자신을 믿는 개인 의지는 절대 자유의 활동 공간이 있어야 하고 또한 자유로운 확장의 절대 권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위 그리고 그 결과가 절대적인 진리성을 가지며 하늘의 의지를 대표한다고 확신한다. 실제적으로 그들과 그들이 속한 집단은 자신의 특수한 이익이 있다. 그들은 이런 이익을 쟁취하고 실현하기 위해 분투한다. 이것은 본래 크게 비난할 것은 못된다. 그런데 그들이 항상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런 점을 감추고 그들의 모든 행위가 순수하다고 선전하는 것은 고통스런 재난에 빠져 자신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회 반항이 고상한 것으로 변하였다.3) 사회에 반항하는 유민 집단에서 “하늘을 대신해서 정의를 행함(替天行道)”의 깃발을 높이 치켜 올렸으나 거기에는 “왕도주의” 사상이 결핍되었다. 유민 지도자는 땅바닥을 그려놓고 자신을 왕으로 삼고 엄격한 등급 분배를 진행하였다. 외적이 출현하면 “하늘을 대신하여 벌을 내린다(代天行罚)” 등을 제기하였다. 이런 점들은 “수호전”, “홍길동전” 등 통속적인 문예 작품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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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한양대학교에서 의뢰한 유민 사상 번역(중국어번역)의 일부를 살펴 보았습니다. 
번역은 기버 번역